slide-image

정돈된 사람은 다르다. 카토 쥬리가 답지 않게 많은 사람을 만나며 정의한 내용은 명확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일에 준비가 되어있으며 순간의 기로에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주관을 관철한다. 불합리한 일을 당하면 명석하게 판을 깔아 위기를 해결한다. 사람 중에서도 스스로가 깔끔히 정리된 사람은 어쨌든 달랐다.

이런 시시콜콜한 생각을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인파 속에서 멍하니 연설했다. 마치 자신을 지나치는 사람들이 들어주기라도 하는 양 오른손으로 탁상을 쾅 내리치는 모습을 상상하자 뒷짐을 쥐고 있는 진짜 오른손이 움찔거렸다.

상상과 현실의 거리감. 카토 쥬리는 이틀에 한번. 어쩌면 그보다 더 자주 상상이라는 창문을 열어 바람을 쐬었다. 평소 서풍이던 바람은 가끔 가던 길을 틀어 남쪽으로 손을 펼칠 때도 있었고, 아예 모습을 감추기도 했다. 창문 밖의 언덕에는 하얀 지붕의 풍차가 한적하게 돌아갔고 조금 더 시선을 멀리 던지면 보이는 바다는 옅은 에메랄드빛이었다. 우뚝 선 등대는 더 진하고 깊은 푸른색으로 항상 태양 밑을 지키고 바라본다. 잔디밭에 듬성듬성 핀 들꽃은 언젠가 어릴 때 본 애니메이션 속 경치와 꼭 닮았다. 자연보다는 빽빽하게 채워진 하얀 풍경과 의료 장치 속에서 지내온 시간이 길어서일까. 낯설지만 꽤나 흡족한 상상이라고 매번 떠올렸다.

흰색과 녹색의 대비. 공허와 색채의 이질감. 현실의 희고 질서정연한 풍경에는 매번 옆을 지켜주는 사람이 있었다. 녹색의, 살아있는 생물만이 가질 수 있는 생동감 가득한 잎사귀가 핀 화분을 손에 들고서. 상상에는 없는 인물.

카토 쥬리는 아무도 없는 세계에 자주 빠져들었다.
옆에 야시로 세츠나가 있더라도.
야시로 세츠나는 자주 그녀의 옆을 지켰다.
곁에 카토 쥬리가 없더라도.